다윈이 일평생 성취한 업적은 다른 사람들이 두 번의 생에서도 그저
꿈만 꿀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아주 해괴하고 문제 많은 결과를 야기했다. 진화를 얘기할 때 모든 사람이 그의
이름만을 거론한다는 것이다. "다윈이 X에 대해 틀린 이유" "다윈은 Y에 대해 잘못 알았는가?" "다윈이 Z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점" 등,
이러한 문구들은 신문과 잡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한다. 생물학 관련과 일반 주제의 간행물 모두 이런 식의 헤드라인을 잡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항상 사용된다. 다윈주의(Darwinism) 다윈주의자(Darwinist) 다윈주의적(Darwinian).
왜 이런 식의 언어가 문제일까? 이유는 이런 식의 언어는 이슈를
완전히 오도(誤導)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는 다윈이 진화 생물학의 처음이자 마지막,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암시를 한다. 마치 진화 생물학이
149년 전 '종의 기원'의 출판 이후 전혀 '진화'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다윈이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진화 생물학이 '종의
기원'으로 진화가 멈춘 것도 아니다. 다윈의 아이디어 중 몇 개(자연 선택이나 성 선택 이론 등)은 여전히 진화 생물학의 초석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현대 진화 생물학은 '종의 기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타임 머신을 타고 가서 다윈을 현대로 모셔올 수 있다면
다윈이 현대 진화 생물학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진화 생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공부해야 할 필수과목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유전학, 통계학 그리고 컴퓨터 공학이다.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할 말의
목록을 작성하는 데만도 몇 주가 걸릴 것이다. 하지만 가장 명백한 시작점은 유전학, 그 중에서도 특히 DNA의 발견이다. 모든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에는 코드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이 코드는 해당 유기체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한다. 이 코드는 화학적
형태(DNA)로 쓰여져 있고 진화의 포스는 항상 새로운 코드 작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실제로 DNA를 연구함으로써 자연선택 법칙의 작용을 분자(分子)
단위로 관찰할 수 있다. 자연 선택 법칙이 진화적 변이를 방해하는 부분, 변이를 촉진하는 부분, 전혀 변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의 유전자를
우리는 이제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유전학과 자연선택론의 융합도 이해시켜야 한다. 이는 자연선택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광범위하게 넓혀주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융합으로 인해 우리는 자연 선택이 단순히 개체 형성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자연 선택은 이에 더해 집단 차원에도 작용하며 협동의 진화, 그리고 다른 이타적 행동으로의 적응을
유도한다.
특정 진화의 성패는 이제 측정될 수 있다는 것도 이해시켜야 한다.
이 측정은 한 개체가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유전자에 얼마만큼 공헌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자식을 낳지 않고 죽으면 그 개체의 유전적 공헌은 전혀
없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간접적 공헌은 할 수 있다. 이 간접적 공헌은 자신이 직접 후손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족 구성원이 후손을
생산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핏줄 선택(kin selection)"이 군집 생활을 하는 곤충들(벌, 개미, 와스프, 터마이트
등)의 진화에 공헌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 곤충들은 모두 직접 후손 생산을 하는 개체의 수효는 적지만 집단 구성원 모두가 생산된 후손들의
양육에 공헌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연 선택 이외에도 다윈과 이야기할 주제는 많다. 때로 진화적
변화를 촉진하고 어떨 때는 방해하는 다른 포스들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자연선택이 비록 진화에 있어서 유일한 창조적 포스(날개가 생기거나
눈이 생기는 것 따위는 자연선택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하지만, 어떤 유전자가 널리 퍼지고 어떤 것이 사라질 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연 선택
말고도 많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다윈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내 생각에 그의 반응은 만족감과 경이감이 섞인 것일 것이다.
만족감은 자연선택이 결국 그토록 강력한 아이디어였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고, 경이로움도 만족감과 같은 이유에서의 경이로움일 것이다. 150년 전
이래로 발견돼 온 자연사(自然史)의 괴이함에 다윈은 매혹될 것이다. 예를 들어 월바키아(Wolbachia)라는 박테리아의 경우 곤충의 재생산
과정을 완전히 왜곡해 버린다. 이 왜곡 현상은 많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을 보면 곤충의 암컷이 수컷을 낳으면 바로 다
죽여버린다. 이는 수컷의 경우 월바키아 박테리아를 다른 개체들로 옮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월바키아 입장에서 보면 수컷들은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아무 쓸모 없는 쓰레기들이다.
다윈이 DNA 시퀀스를 분석하는 것을 즐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살아 있는 유기체만 가지고 놀던 그에게 DNA 시퀀스 분석은 너무 추상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분석의 결과는 그를 기쁘게 할 것이 틀림없다.
또한 우리가 현재 소위 말하는 모델 유기체(model organism)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외의 것에는 얼마나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학 연구의 성격도 그를 놀라게 할 것이
틀림없다. 과학연구의 규모, 비용, 출판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전문화. 그가 하던 과학, 곧 20여 년간 사유하고 연구하다가 마침내 출판을
하던 방식은 현대에서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잠시 샛길로 빠진 것일 뿐 내가 말하려던 주제가
아니다. 내 주장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다윈주의' '다윈주의자' '다윈주의적'이라는 해로운 단어들을 없애고자 한다. 이 단어들은 현대의 진화
생물학이 다루고 영향을 미치는 분야가 아주 좁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치 150년 전의 한 사람에 의해 창조된 상태에서 화석으로 굳어진 분야라는
느낌을 준다. 진화 생물학은 그 이후 방대하고 복잡한 분야가 되었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분야이다.
다윈 이후로 이 분야에 공헌한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어떤 분야의
과학이 150년 전 어떤 사람이 발견할 것을 모두 발견했다고 한다면 그 분야는 과학이 아닐 것이다. 다윈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 그가 이것
저것에 대해 옳았느니, 틀렸느니 하는 질문이나 주장을 하는 행태에는 다윈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있으면, 그것이 마치
진화생물학이라는 분야 자체의 기반을 무너뜨리거나 위협한다는 생각이 밑에 깔려있다.
그렇지 않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연선택에 대해 더 알아나갈
것이며 자연선택이 유전자와 게놈을 형성하는 새로운 방법들에 대해 발견해 나갈 것이다. 유전학의 데이터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면서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질문들, 진화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세부사항에 대해 새로운 질문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때(아예 가르치지 않는 학교도
있지만) 이를 찰즈 다윈의 이론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것으로 진화론에 대한 수업은 끝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넘어가서 심장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식물이 광합성은 어떻게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 배우느라 정신 없다. 생물학 전반을 관통하는 맥락을 제공하는 진화론, 생태계의
빛나는 다양함에 대해 질문을 하고 조사를 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진화론, 이런 진화론은 무시된다.
다윈은 놀라운 분이었다. 그는 진화 생물학이라는 분야의 기초를 세운
분이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이 분야에 대한 최초의 주요 성취였을 뿐, 최후의 성취는 아니었다. 진화생물학에 '다윈주의'라는 라벨을 붙인다는
것,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다윈주의적' 진화라고 형용한다는 것은 마치 항공 공학을 "라이트주의(Wrightism)"이라고 부르고 고정날개
비행기를 "라이트 적"인 비행기라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다윈에게 표할 수 있는 가장 큰 경의는 그를 이 분야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거기서 끝내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뒤에 '주의(-ism)'라는 접미사를
붙였지만 다윈마냥 현대 과학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아이디어를 낳은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